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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님 20만 힛 축전 - First Battle of Grozny (November 1994)

근래 '정치국의 대중화, 전인민의 정치원화'를 주창하시며 대활약을 하시던 순명대제께옵서 최근 스타하노쁘 동지도 울고갈 큰 성과를 산출하셨다고 하니, 이에 저같은 게을러빠진 이도 자극을 받아 그 위대한 성과를 경축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처럼 무능한 이는 전인민이 갈고 닦는다는 재주인 포샵질도 능숙치 못하고, Eternal wind를 불러드리고자 해도 마이크가 없을 정도로 궁핍하니 그저 평소 하던 짓이라도 제대로 하자는 의미에서 미약한 포스팅으로 축전을 대신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Source - Wikipedia)

소비에트의 붕괴와 러시아내 소수민족 자치권 보장 조약 (이 부분은 나중에 더 깊이 다룰 생각이지만 간략하게나마 적어보겠습니다.)
 
1991년 12월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이후 러시아는 독립적인 국가가 된다. 러시아는 소련의 후계국으로 널리 인식되었으나 예전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크게 상실한 상태였으며,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인구의 70% 이상은 인종적으로 러시아인이었으나 인종과 종교면에서 큰 차이로 인해 몇몇 지역에선 정치적 대립이 발생했다. 소련 시기에 러시아에선 100여개의 민족이 존재한다고 인정되었고 그들은 연방내에서 여러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런 민족들과 새로운 연방정부와의 관계및 그들의 자치권 요구 문제가 1990년대 초기 러시아의 주요한 정치적 이슈로 떠오르게 된다.

옐친 대통령은 이런 소수민족들의 요구를 통합하여 1990년 선거에서 '소수민족의 의지에 우선권을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방내 소수민족들의 실체와 그들의 권리에 대해 확실한 정의를 내려줄 법이 시급히 요구되었고 1992년 3월 31일, 옐친과 최고 소비에트 회의 의장 루슬란 카스불라토프(체첸출신) 86개에서 88개에 달하는 연방내 소수민족에 대한 연방조약에 각각 싸인한다.

더 큰 자치권이나 독립을 요구하는 조항들을 담고 있는 요구사항들은 지역적인 자치의 용인과 세금 혜택 등에 의해 대부분 충족되었다. 조약은 연방내 소수민족들을 크게 3가지 형식으로 나누고 지역정부와 연방정부가 각기 갖는 권한을 명시했다.

유일하게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은 민족집단이 바로 체첸과 타타르스탄이다. 결국 1994년 봄, 옐친대통령은 미니티머 셰미예프 타타르스탄 대통령과 함께 더 큰 자치권에 대한 요구를 보장하는 협정을 맺게 된다. 따라서 체첸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은 유일한 집단으로 남게 되었다. 옐친과 체첸정부 그 어느쪽도 진지한 협상을 시도하지 않았고 상황은 전면적인 분쟁으로 치닫게 된다.

체첸의 독립선언

아직 소비에트가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인 1991년 9월 6일, 전직 소련 공군 장성 조하르 두다예프가 이끄는 체첸국가인민회의(NCChP)당의 민병대가 독립선언을 목표로 하여 체첸-잉구쉬 소련자치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의회의 의회장에 난입한다. 그들은 그로즈니의 소련 공산당 최고 책임자를 창 밖으로 내던져 죽였고, 다른 당원들을 폭행했다. 그리고 체첸-잉구쉬 소련자치공화국 정부를 해산시켰다.

이후 몇달동안 두다예프는 연방정권을 지지하는 임시정부를 쫓아낼 정도로 압도적인 대중적 지지를 얻는다. 그는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고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1991년 11월엔 옐친 대통령이 그로즈니에 군대를 파견하지만 두다예프의 병력들이 그들을 공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저지한다. 체첸이 스스로의 첫 주권 선언 이후 체첸-잉구쉬 자치공화국은 1992년 6월, 러시아의 북오셰티아공화국과 일어난 잉구쉬 분쟁에서 둘로 갈라지게 된다. 이후 잉구셰티아 공화국은 러시아 연방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그 동안 체첸은 1993년 체첸 이츠케리아 공화국으로서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체첸 내부의 분쟁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비 체첸인에 대한 폭력행위가 보고되는 와중에 수만명의 비체첸인들(주로 러시아인)이 체첸공화국을 떠났다. 체첸의 산업은 많은 러시아인 근로자와 엔지니어들이 체첸을 떠나거나 추방됨에 따라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동안 두다예프의 생각에 공감하거나 두다예프를 반대하는 여러 부족들은 권력을 놓고 싸움을 벌였고 때때로 중화기를 사용하는 격렬한 전투로 치닫기도 했다.

1992년 3월, 반 두다예프파는 쿠테타를 시도했으나 무력으로 저지당한다. 한달 후, 두다예프는 직접적인 전권통치를 선포했으며 1993년 6월엔 그에 대한 불신임투표가 국민투표로 실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회를 해산했다. 1992년 10월말, 오세티아-잉구쉬 분쟁에 참전할 러시아 연방군이 체첸국경에 배치되었으며 두다예프는 이를 "체첸 공화국에 대한 위협행위"로 규정, 국가계엄령을 선포하고 러시아 병력이 체첸국경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국가적인 동원을 실시하겠다고 위협했다. 1993년 12월 또다른 쿠테타 기도가 발생한 후 반대파들은 임시의회를 결성하여 잠재적으로 체첸의 정부를 대신할 조직을 창설했고 모스크바에 지원을 요청했다.

1994년 8월, 반대파 부족들의 연합군이 북부 체첸지방을 거점으로 하여 두다예프 정권을 없애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을때, 모스크바는 비밀리에 이들 반군에게 경제적지원과 군사장비, 용병들을 제공했다. 러시아측은 체첸국경을 군사적으로 봉쇄하고 영공을 장악하는 동안 그로즈니시를 향한 반대파의 모든 공격을 지연시켰다. 10월 30일, 모든 표식을 지운 러시아 비행기가 수도 그로즈니를 향해 폭격을 개시했다. 러시아 군과 합류한 반대파의 병력들은 비밀리에, 그러나 매우 조악하게 조직된 공격을 94년 10월 중순내내 그로즈니에 실행했다. 이 공격들은 별 성과가 없었고 1994년 11월 26~27일에 걸쳐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된다.


1차 그로즈니 전투 (1994년 11월 26일)

November 1994 Battle of Grozny
Part of First Chechen War
DateNovember 26, 1994
LocationGrozny, Chechnya
ResultChechen government decisive victory, effectively beginning of the First Chechen War
Combatants
Chechen Provisional Council
FSK mercenaries
Chechen Republic of Ichkeria
Commanders
Umar Avturkhanov
Beslan Gantemirov
Aslan Maskhadov
Strength
1,200 to 5,000unknown
Casualties
~500 killed and 200 captured (including over 70 Russians[1])unknown


전투는 두다예프 반대파의 병력들과 이를 지원하는 러시아군의 전차, 항공기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 은밀한 정권 전복 시도는 완벽한 실패로 끝났으며, 다음달 모스크바가 체첸에 대한 대규모 군사적 침공을 수행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배경

1994년 여름, FSK(FSB의 전신, 연방 방첩부)는 체첸내에서의 작전을 개시하고 체첸의 두다예프 반대파 지도자들과 협력을 시작했다. 우마르 아투르카노프(전직 소련 내무부 장교)의 병력들과 베슬란 간테미로프(전 그로즈니 시장)의 병력들은 모스크바로부터 자금(1500억 루블이 언급되었다.)을 지원받았을뿐만 아니라 무기도 지원받았다. 1994년 8월과 9월에 걸쳐 반대파와 두다예프의 군대간에 전투가 계속되었고 이 시기에 반대파는 수백명의 병력과 장갑차량, 모즈독 비행장에 기지를 둔 러시아군 헬기로부터 지원을 받는 부대를 편성했다. 반대파의 공세는 94년 10월 중순, 간테미로프의 병력들이 처음으로 그로즈니 시를 직접 점거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을때  종막을 맞게 된다.

10월의 전투 이후, 그들의 군사적인 취약함을 알고 공격실패에 실망한 전직 하원의장 루슬란 카스불라토프는 FSK에 대한 로비를 강화하여 옐친 대통령의 참모진에게 모스크바가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부분을 늘리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아투르카노프와 간테미로프는 서로의 병력을 합류시켰고 필요한 모든 무기와 교관, 훈련과 미디어까지 그들이 요청한대로 지원받았으며 마지막 전투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 임무를 위해 러시아군의 정예전차부대의 전차승무원들이 모집되었다.

전투의 진행

그로즈니시에 돌입하기 얼마 전, 러시아군 정보국(GRU)의 첩보원들은 도시로 향하는 동안 이미 3대의 러시아군 전차가 격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다예프의 군대는 강력한 저항을 할만한 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11월 26일 아침, 체첸 임시의회의 병력들은 구별가능한 표식을 지운 러시아군 헬기들의 지원을 받으며 수도에 진입했다. 체첸 정부군(두다예프의 군대) 지휘관 달칸 코자예프의 증언에 따르면 반대파는 42대의 전차와 8대의 BTR 장륜장갑차, 3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고 한다. 다른 이들은 반대파의 병력을 최대 170대의 전차와 APC, 5000명의 병력으로 추산했고 반대파 지휘관의 증언에 따르면, 1200명의 병력이 이 공격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병력들은 즉흥적이지만 맹렬한 정부군의 반격에 직면했고 곧 전투는 재앙으로 돌변했다. 거의 20시간에 달한 치열한 전투이후, 두다예프의 군사들은 반대파의 장갑차량 대열을 박살내버렸고, 전차와 장갑차들의 승무원을 맡은 수십명의 러시아 병사들과 장교들이 포로로 잡혔다. 37대에서 67대에 이르는 장갑차량이 파괴되거나 가동불능이 되었다고 보고되었으며, 그동안 4~5대의 멀쩡한 전차가 반대파 군사들이 도주한 이후 고스란히 두다예프의 정부군에게 노획되었다.(체첸국기를 달고 시내를 질주한 바로 그 전차들 -_-;;) 이에 더해 러시아군에 의해 운용된 4대의 헬리콥터와 1대의 Su-25 공격기가 격추되었다. 남아있는 모든 러시아군 전차부대와 이를 지원하던 반대파의 병력들은 같은 날 도시에서 후퇴했다.

결과

이 패배는 군사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재앙이었다. FSK에 의해 비밀리에 고용되었고 이 전투에서 잡힌 러시아군인들은 두다예프의 장기집권을 위한 선전용 도구로 쓰였다. 이를테면 "두다예프 반대파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모스크바의 제국주의 게임을 위한 도구들만이 있을뿐이다!"는 식으로 말이다. 러시아가 이 전투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처음에는 모스크바에 의해 부인되었으나 두다예프의 병사들이 몇몇 잡힌 러시아군 병사들을 TV 카메라 앞에서 행진하게 함에 따라 인정되었다. 

11월 26일의 패배는 러시아가 두다예프에 맞서 대리인을 내세워서 전쟁을 하는 수단을 고갈시켰고 그 다음달에는 러시아 국방장관 파벨 그라체프 "단 2시간이면 1개 공수연대로 도시를 장악할 수 있다" 고 큰소리친 또 다른 재앙적인 직접 군사개입으로 이어지게 된다[..]



개인소견

러시아가 구상한 대리전쟁은 크게 3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이는,

1. 종합적인 정보수집과 분석의 실패 - 모스크바는 반대파와 러시아군의 전투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두다예프의 정부군을 심히 과소평가했다. 이 당시 두다예프의 보유병력은 자세히 알려지진 않았으나 러시아군이 직접 개입하지 않은 상황인만큼 반대파에 비해 더 많은 병력을 보유했을 것이며 두다예프 자신은 소련공군 장성출신에, 이 전투를 이끈 마스하도프는 소련군 포병 대령 출신이다. 정치가가 결성한 반대파의 민병대에 비해 두다예프의 군대는 대부분 소련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으며 체첸의 전권을 장악하면서 오랜 기간 군사훈련을 실시할 여유가 있었다. 이에 더해 두다예프의 병력들은 도시의 주요거점을 장악하고, 11월 이전부터 방어태세를 굳혔다. 이런 모든 불리한 요소는 적절히 보고되지도 못했고 모스크바는 그저 자금과 장비지원만 있으면 반대파가 충분히 정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2. 군사적 실패 - 반대파의 병력들은 기초적인 군사훈련도 완료된 상태가 아니었으며 당연히 러시아군 전차, 헬기들과의 협동작전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투입병력도 충분하지 못한 상황인데다가 전투는 그해 8월부터 시작된 반면 결정적으로 두다예프의 전력을 패퇴시킬만한 승리가 없었기에 반대파는 많은 중화기와 장비를 지원받았음에도 그 숙련도는 지극히 열악했고 반대로 두다예프의 병사들은 시가지에서 방어전을 치룰 준비를 충분히 갖출 시간적 여유를 가졌다. 이에 더해 남쪽의 그루지야로부터 두다예프군을 지원할 보급대열은 차단되지 못했고, 그로즈니 시가전 역시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진입한게 아니라 단순히 밀고나간것에 불과하다. 반대파의 보병들은 쏟아지는 사격에 곧 흩어져버렸고 러시아군 전차들은 자신들의 대열속에 갖혀 허둥댔으며 제대로 응사조차 하지 못했고 빠져나가지도 못한채 RPG세례에 격파되었다. 지원에 나선 헬기와 항공기들 역시 그리 잘 조직된 대공포화를 만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사격을 받고 추락했다. 이런 문제들은 이후에 치뤄진 전투에서도 자주 반복되었으나 서로 다른 소속의 부대끼리 협동훈련 없이 치뤄진 이 전투에선 더욱 심각했다.

3. 주도권 장악의 실패 - 이 전투의 패배는 정치적으로도 그 손실이 막심한 것이어서, 반대파의 입지와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모스크바가 전개상황에 있어서 충분한 주도권을 쥘만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전투를 패배한 시점에서 모스크바가 도저히 두다예프 정권을 용납할 수 없다면 이 전투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개선해서 대대적인 공격으로 최대한 빨리 두다예프를 끝장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치뤄진 러시아의 직접 공격은 모두 전술적으로 큰 문제점을 노출했고 결과적으로 완전한 패배였다. 러시아는 계속되는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어야 했으며 여론 역시 꾸준히 악화되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장점(친러시아정치세력의 존재, 확고한 제공권과 화력우위, 러시아인 추방과 두다예프의 독재에 반대하는 여론)들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계속 수렁속에 빠져있다가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 이 당시 옐친이 알콜중독증세로 인해 제대로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설도 있는데, 정책결정과정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PS 1 : 일터에서 재빨리 쓴 것이라 퀄리티나 풍부한 짤방, 영상 등이 없는 점 양해바랍니다[..]

PS 2 : 축전드리고 싶은 분은 많은데, 제가 워낙 재주가 없고 이런 종류의 글빨은 축전용으론 좀 너무한듯하기도 하고[...] 요청을 받은 적도 없어서 머뭇거려왔습니다만 앞으로 종종 이웃분들께 날려드리겠습니다;;(그전에 약속한 포스팅부터 쓰란 말이닷!)

PS 3 :



대제님 20만힛 축하드립니다!!!



by 라피에사쥬 | 2007/12/28 17:13 | Battle - 프로젝트란(미정) | 트랙백 | 덧글(9)

포드급 항모 이야기 pt. 3 : 성능과 가격



생각해보니 이 시리즈는 이름짓기 논쟁만으로 포스팅을 2개나 때웠군요. 이 얼마나 땜방포스팅정신에 어울리는 사례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퍽]


일단 CVN -78 Ford class란 이름이 붙기 이전까지 니미츠급을 잇는 신형 항모 프로젝트는 CVNX 혹은 CVN-21 프로젝트로 불려왔습니다. CVNX의 컨셉은 다른 미해군의 신형함과 마찬가지로 냉전종결이후 꾸준히 변화해왔으나 당초 엄청나게 혁신적인 스텔스 설계를 도입할것으로 기대된 반면 현재까지 공개된 개념도나 자료들은 항모의 형태가 비교적 니미츠급에 가까울 것으로 추측하게 합니다. 기본적인 선체는 여전히 니미츠급과 유사한 편입니다.

그러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CVN-78은 굉장히 많은 변화를 맞이합니다. 우선 수명과 재급유없이 활동 가능한 시간이 크게 연장된 것으로 알려진 A1B 원자로 2기를 탑재하는데, 이는 지난 수십년간 사용했던 웨스팅 하우스사의 원자로를 대신하게 됩니다. (웨스팅 하우스사의 해군 함정용 원자로는 A1W,A2W,A3W,A4W가 있고 A4W가 니미츠급에 탑재) 현재 CVN-78은 취역기간중 단 한번의 핵연료 재급유를 받고서 50년을 현역으로 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레이더 탐지 면적의 감소를 위해 전체적인 디자인에 스텔스 설계를 도입했고, 이를 위해 특히 아일랜드의 설계가 여러번 변경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연히 아일랜드쪽에 집중된 전자장비들의 배치나 설계도 영향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전자장비가 니미츠급에 비해 신형 내지는 개선된 것이 탑재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특히 함 고유의 독자적인 위상배열 레이더 시스템의 탑재가 예상되고 있는데 아직은 완전히 결정된 사항이 아닙니다.(코스트 상승을 야기하므로)

전투시스템 측면에선 F-35나 UCAV 등의 신형기의 운용을 전제로 하고 있는만큼 역시 대대적인 개선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특히 함재기의 항속거리가 증대됨에 따라 항모의 전투행동반경도 크게 확장될 것으로 예상되는만큼 타 군의 정보자산(AWACS같은)및 전투시스템과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 받으며 네트워크 전을 수행할 수 있는 첨단체계의 도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추진 시스템면에서 신형 원자로 다음으로 니미츠급과 다른 점은 바로 전자기 캐터펄트를 탑재한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포드급은 니미츠급처럼 따로 4개의 증기 터빈을 설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존의 캐터펄트보다 추진력이 강하여 이륙시 함재기가 항력을 얻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경감시켜 무리를 덜 가하게 해줍니다. 또한 증기 터빈까지 연결될 필요가 없기에 함의 구조를 단순화시키는데 도움을 주어 건조기간과 코스트 절감에 도움이 되는 편. 한편으로는 최근 논란이 된 바 있는 Chi Mak(중국계 미국인 군수업자로 중국에 미 군사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체포됨)이 중국에 유출시킨 기술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_-;; 기술협력을 통해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급 항모에도 도입될 예정입니다.

어레스팅 기어 역시 착함시 함재기에 충격을 덜 가하도록 진보된 형식이 도입될 예정이며, 그 외에도 함의 자동화에 많은 투자가 이뤄졌습니다. 포드급은 다른 미해군의 신형함들과 마찬가지로 함의 운용인원을 줄이고 자동화를 달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심지어는 함이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경우에도 적은 인원으로 운용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포드급의 운용인원은 4600명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5600명 이상인 니미츠급에 비해 1000명이나 줄어든 획기적인 절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의한 인건비와 보급소요의 절감효과는 대단하다고 볼 수 있고 이 때문에 미해군은 비싼 건조비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차기항모의 종합적인 운용비는 니미츠급들보다 크게 감소하여, 미 의회가 충분히 받아들일수 있을만한 예산안을 제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해군에서 가장 비싼 전투함이라 할 수 있는 항모의 건조는 언제나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현재 CVN-78의 건조에는 연구개발비(R&D) 50억 달러를 포함해 최소 135억달러에서 140억달러 이상의 엄청난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특히 R&D 비용은 더욱 증가될 가능성이 높으며 차후 건조될 포드급의 자매함들의 척당 비용이 어찌 될지도 아직 추측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올해 3월 존 F 케네디급 항모가 퇴역한 이후 미해군은 포드급의 꾸준한 건조 없이는 11척 항모진영마저 유지하기 힘들것으로 판단하여 의회에 미래 해군 예산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을 요청했고 의회와 합동참모본부는 이에 대해 많은 토론을 거쳤습니다. 7월 24일의 상원군사위원회휘하 해군력에 관한 하부위원회는 일단 차후 30년간 7척의 항모건조를 추천했고 최대 8척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45000톤 급에 1개 squadron 분 F-35B 전투기가 탑재 가능한 상륙함의 건조에 20억 달러 정도의 비용밖에 소모되지 않는 반면 포드급의 건조비용이 매우 비싼 편이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돈 럼스페라도가 계속 국방장관에 있었다면 신형항모 건조 계획에도 엄청난 위협이 가해지지 않았을까[..])

포드급 1번함 CVN-78 Gerald R. Ford 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항모의 건조와 항모탑재 원자로의 재급유가 가능한 곳인 노스롭 그루먼 뉴포트 조선소에서 올해 초부터 건조에 들어갔으며 2015년까지 완성될 예정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기본제원을 살펴보면

최대배수량 : 약 100,000 톤
길이: 갑판 기준으로 1,092 feet (332.84 m)
너비: 해수면기준으로 134 feet (41 m) 갑판기준으로는 252 feet(76.8 m)로 추정?
추진기관: 2개의 원자로
속도 : 30+ knots (56 km/h)
탑승인원 : 4,660
자체무장 : SAM과 CIWS
탑재 항공기 : 75 대 이상

배수량과 전체 길이, 면적 등은 니미츠급과 유사한 선체를 쓰는만큼 상당히 비슷한 편으로 추측되지만 조금은 더 커질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자체무장의 경우 특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일단 ESSM 발사기는 2대 정도 탑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CIWS는 조금 복잡합니다. 20mm CIWS 팔랑스가 2대 이상 장착된 개념도가 많지만 일단 니미츠급의 최신함인 CVN-76의 자체무장은 스패로우 발사기 2대에 RIM-116 RAM 발사기 2대 밖에 없었으니까요.(일단 RAM의 경우만 해도 모든 니미츠급에 도입된게 아니고 핵연료 재급유를 위해 뉴포트 항에 들를때마다 장착되므로 현재 3척만이 장비중입니다. 또 팔랑스의 경우 역시 함에 따라 장착 댓수가 다릅니다. 칼 빈슨의 경우는 무려 4대나 장비중이죠)

개인적으로는 팔랑스 2대 RAM 2대, ESSM 발사기 2대 정도가 장착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만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로써 처음 구상했던 시리즈성 포스팅이 하나 끝났군요. 부족한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를.

현재 이글루스의 변화가 갈수록 대중적으로 치닫고 있는데 저도 매니아성 블로그를 유지하고 있는만큼 다른 곳으로의 이적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므로 일단 예전에 요청받았던 번역을 끝내는 것을 당분간의 목표로 잡겠습니다.

by 라피에사쥬 | 2007/11/03 10:19 | Battle - 프로젝트란(미정) | 트랙백 | 덧글(6)

2차 체첸전쟁 - 그로즈니 시내 기습 2004. 8. 21.

2004 raid on Grozny
Part of Second Chechen War
DateAugust 21-22, 2004
LocationGrozny, Chechnya
ResultRebel victory
Combatants
Russian Federation Chechen separatists
Commanders
Doku Umarov
Strength
N/A250-400
Casualties
At least 63 killed (est.)At least 1 killed and 3 captured




2004년 그로즈니 시내 기습은 그로즈니 시 중심가에 가해진 일련의 공격으로서 최소한 58명의 체첸보안군, 5명의 연방군, 10여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사그룹에 의하면, 250~400명의 체첸반군들이 8월 21일 시내에 진입하여 도로상에 그들만의 장애물과 검문소를 설치하고 동시에 몇개의 경찰서와 보안군 시설들을 공격했다고 한다.


PS : 더 자세한 러시아발 기사는 여기에 http://www.memo.ru/eng/memhrc/texts/4groz-at.shtml 

간략하게 소개했지만, 이 사건보다 2달 전에 있었던 잉구셰티아의 나르잔 급습과 더불어 2005년까지 이어지는 체첸반군이 수행한 강습공격의 대표적인 형태중 하나입니다.

나르잔에서는 군사목표를 제거하기 위해 나선 반면, 그로즈니에선 체첸연방정부의 치안능력을 약화시키고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체첸보안군을 목표로 전투를 수행했습니다. 한나절 가량 시내의 치안담당자가 뒤바뀌어버린 셈이죠.

반군들은 보안군이 지키고 있던 검문소를 공격해 제압한후, 이 검문소에 들른 경찰차를 쓸어버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_-;;

이 포스팅은 2차 체첸 전쟁의 정규전과는 따로 관리해야하는 insurgent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꽤 불리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과감한 공격으로 되받아치는 체첸반군들의 특성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먼저 적어봤습니다.


by 라피에사쥬 | 2007/08/01 23:40 | Battle - 프로젝트란(미정) | 트랙백 | 덧글(12)

2차 체첸 전쟁 - 776 고지 전투

Battle of Ulus-Kert
Part of Second Chechen War
Image:Ulus-Kert.jpg
Russian paratroopers killed in action on Hill 776, in a photo taken after the battle by a rebel fighter
DateFebruary 29-March 1, 2000
LocationNear Ulus-Kert, Chechnya
ResultChechen victory
Combatants
VDV, Spetsnaz and OSNAZ special forces Chechen rebels
Mujahideen
Commanders
Mark YevtukhinAbu al-Walid
Strength
On the Hill 776
1 VDV company (90)
In the Ulus-Kert area
3 VDV battalions with attached Spetznaz elements, 1 artillery battalion, a Vympel group (in all about 1,000 or more)
On the Hill 776
At least 70
In the Ulus-Kert area
More than 100 to 2,000 (probably over 300)
Casualties
At least 84 to 200 killed25 to 400 killed
Second Chechen War
(1999-2000 Russian offensive)
Grozny - Hill 776 - Komsomolskoye - Zhani-Vedeno



우루스 케르트 전투
로도 알려진 776 고지 전투는 2차 체첸전쟁중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는 부분으로 1개 중대 규모의 러시아 공정부대원들이 아르군 계곡근방에서 며칠간의 과정을 거쳐 전멸된 사건이다.

해당 부대는 76 근위 공정사단(고향은 프스코프), 104 공정연대 2대대의 제 6중대다. 교전의 여러 측면에 대해선 지금도 많은 의문이 남아 있는데, 이를테면 러시아군 사상자의 정확한 숫자나 어째서 776고지를 방어한 부대가 지원군이나 근접항공지원을 전혀 받질 못했는지와 같은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84명에서 86명의 러시아군 병사들이 전사했다고 보도되는 동안 러시아 공정부대 사령관 조르기 슈팍과 체첸연방군(러시아 연방 체첸 공화국의 군대)의 지휘관 제나디 트로셰프는 처음엔 31명만이 전투에서 희생되었다고 그릇된 주장을 펼쳤다.(3월 6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체첸인 대변인인 세르게이 야츠르젬스키 역시 중대가 며칠간의 전투로 잃은 총 손실을 31명 사망이라고 언급했다.) 전몰중대에서 사망한 13명의 장교와 9명의 병사들에게 러시아연방 영웅훈장이 추서되었다. 다른 러시아 부대의 손실은 발표되지 않았다. 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 - 러시아 국방부의 공식 기관지)는 체첸반군측의 손실은 사망자만 약 400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군측은 776고지 전투에서 12명을 잃었고 같은 시간 치뤄진 우루스 케르트 지역 전투에서 3명의 터키인을 포함해 13명이 죽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러시아군 전체의 피해를 200명 가량의 사망자(100명가량의 프스코프 코만도를 포함해서)가 발생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비체첸인 정보원은 체첸군의 병력을 300명 이상으로 추측했다.

이 전투에 대한 러시아내 논쟁은 크게 두 가지 요점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러시아 군의 파멸적인 패배였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카메론에서 프랑스 외인부대가 해낸것처럼 VDV의 엘리트부대로서의 명성을 드높일 자랑스러운 결사항전이었으며 우루스 케르트 전투 역시 영웅담으로서 성역화하여 기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PS : 특이하게도 이 전투에 참여한 이츠케리아 체첸(수도를 잃고 쫓겨났으니 위에선 체첸 반군으로 통칭했음)군 측의 지휘관은 아부 알 알리드 입니다. IIB(International Islamic Battalion)의 2대 아미르(군지휘관)로서 사우디 출생으로 아프가니스탄,보스니아,타지키스탄 등지의 전장에서 IIB의 간부급으로 활동하다가 1차 체첸전쟁 때부터 2004년에 사망할때까지 꾸준히 체첸에 머물면서 러시아에 대항해온 인물입니다. 이는 99~00년의 그로즈니 함락을 기점으로 세력이 약화된 반군의 지휘계통에서 외국인의 지위가 다소 높아졌음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쪽의 피해는 이견이 많아서 명확히 확인하긴 어렵지만 러시아 공정부대 1개 중대가 완전히 전멸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또 러시아측은 구소련시절부터 그랬지만 적어도 보도자료상으로는 자기네 피해는 은폐하고, 상대방의 피해를 과장하는 경향이 강해서 러시아측 소스를 전적으로 신뢰하긴 어렵습니다.(아직 진행중인 전쟁이라는 점도 그런 조작에 영향을 주는듯.) 마찬가지로 체첸반군측도 그로즈니를 손실한 상황에서 꽤나 선전하기 좋은 사건이라서 이 전투의 진행과 결과에 대해선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신뢰할만한 자료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http://old.kavkazcenter.com/eng/photo/ulus-kert/ 에 이 당시 처치한 러시아군의 시신을 찍은 사진을 모아뒀더군요. 그리 잔인하진 않습니다만,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프간의 9중대와는 꽤나 대조적인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다소 씁쓸함이 남았습니다.



by 라피에사쥬 | 2007/07/29 23:32 | Battle - 프로젝트란(미정)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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