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28일
대제님 20만 힛 축전 - First Battle of Grozny (November 1994)
근래 '정치국의 대중화, 전인민의 정치원화'를 주창하시며 대활약을 하시던 순명대제께옵서 최근 스타하노쁘 동지도 울고갈 큰 성과를 산출하셨다고 하니, 이에 저같은 게을러빠진 이도 자극을 받아 그 위대한 성과를 경축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처럼 무능한 이는 전인민이 갈고 닦는다는 재주인 포샵질도 능숙치 못하고, Eternal wind를 불러드리고자 해도 마이크가 없을 정도로 궁핍하니 그저 평소 하던 짓이라도 제대로 하자는 의미에서 미약한 포스팅으로 축전을 대신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Source - Wikipedia)
소비에트의 붕괴와 러시아내 소수민족 자치권 보장 조약 (이 부분은 나중에 더 깊이 다룰 생각이지만 간략하게나마 적어보겠습니다.)
1991년 12월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이후 러시아는 독립적인 국가가 된다. 러시아는 소련의 후계국으로 널리 인식되었으나 예전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크게 상실한 상태였으며,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인구의 70% 이상은 인종적으로 러시아인이었으나 인종과 종교면에서 큰 차이로 인해 몇몇 지역에선 정치적 대립이 발생했다. 소련 시기에 러시아에선 100여개의 민족이 존재한다고 인정되었고 그들은 연방내에서 여러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런 민족들과 새로운 연방정부와의 관계및 그들의 자치권 요구 문제가 1990년대 초기 러시아의 주요한 정치적 이슈로 떠오르게 된다.
옐친 대통령은 이런 소수민족들의 요구를 통합하여 1990년 선거에서 '소수민족의 의지에 우선권을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방내 소수민족들의 실체와 그들의 권리에 대해 확실한 정의를 내려줄 법이 시급히 요구되었고 1992년 3월 31일, 옐친과 최고 소비에트 회의 의장 루슬란 카스불라토프(체첸출신) 86개에서 88개에 달하는 연방내 소수민족에 대한 연방조약에 각각 싸인한다.
더 큰 자치권이나 독립을 요구하는 조항들을 담고 있는 요구사항들은 지역적인 자치의 용인과 세금 혜택 등에 의해 대부분 충족되었다. 조약은 연방내 소수민족들을 크게 3가지 형식으로 나누고 지역정부와 연방정부가 각기 갖는 권한을 명시했다.
유일하게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은 민족집단이 바로 체첸과 타타르스탄이다. 결국 1994년 봄, 옐친대통령은 미니티머 셰미예프 타타르스탄 대통령과 함께 더 큰 자치권에 대한 요구를 보장하는 협정을 맺게 된다. 따라서 체첸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은 유일한 집단으로 남게 되었다. 옐친과 체첸정부 그 어느쪽도 진지한 협상을 시도하지 않았고 상황은 전면적인 분쟁으로 치닫게 된다.
체첸의 독립선언
아직 소비에트가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인 1991년 9월 6일, 전직 소련 공군 장성 조하르 두다예프가 이끄는 체첸국가인민회의(NCChP)당의 민병대가 독립선언을 목표로 하여 체첸-잉구쉬 소련자치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의회의 의회장에 난입한다. 그들은 그로즈니의 소련 공산당 최고 책임자를 창 밖으로 내던져 죽였고, 다른 당원들을 폭행했다. 그리고 체첸-잉구쉬 소련자치공화국 정부를 해산시켰다.
이후 몇달동안 두다예프는 연방정권을 지지하는 임시정부를 쫓아낼 정도로 압도적인 대중적 지지를 얻는다. 그는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고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1991년 11월엔 옐친 대통령이 그로즈니에 군대를 파견하지만 두다예프의 병력들이 그들을 공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저지한다. 체첸이 스스로의 첫 주권 선언 이후 체첸-잉구쉬 자치공화국은 1992년 6월, 러시아의 북오셰티아공화국과 일어난 잉구쉬 분쟁에서 둘로 갈라지게 된다. 이후 잉구셰티아 공화국은 러시아 연방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그 동안 체첸은 1993년 체첸 이츠케리아 공화국으로서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체첸 내부의 분쟁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비 체첸인에 대한 폭력행위가 보고되는 와중에 수만명의 비체첸인들(주로 러시아인)이 체첸공화국을 떠났다. 체첸의 산업은 많은 러시아인 근로자와 엔지니어들이 체첸을 떠나거나 추방됨에 따라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동안 두다예프의 생각에 공감하거나 두다예프를 반대하는 여러 부족들은 권력을 놓고 싸움을 벌였고 때때로 중화기를 사용하는 격렬한 전투로 치닫기도 했다.
1992년 3월, 반 두다예프파는 쿠테타를 시도했으나 무력으로 저지당한다. 한달 후, 두다예프는 직접적인 전권통치를 선포했으며 1993년 6월엔 그에 대한 불신임투표가 국민투표로 실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회를 해산했다. 1992년 10월말, 오세티아-잉구쉬 분쟁에 참전할 러시아 연방군이 체첸국경에 배치되었으며 두다예프는 이를 "체첸 공화국에 대한 위협행위"로 규정, 국가계엄령을 선포하고 러시아 병력이 체첸국경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국가적인 동원을 실시하겠다고 위협했다. 1993년 12월 또다른 쿠테타 기도가 발생한 후 반대파들은 임시의회를 결성하여 잠재적으로 체첸의 정부를 대신할 조직을 창설했고 모스크바에 지원을 요청했다.
1994년 8월, 반대파 부족들의 연합군이 북부 체첸지방을 거점으로 하여 두다예프 정권을 없애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을때, 모스크바는 비밀리에 이들 반군에게 경제적지원과 군사장비, 용병들을 제공했다. 러시아측은 체첸국경을 군사적으로 봉쇄하고 영공을 장악하는 동안 그로즈니시를 향한 반대파의 모든 공격을 지연시켰다. 10월 30일, 모든 표식을 지운 러시아 비행기가 수도 그로즈니를 향해 폭격을 개시했다. 러시아 군과 합류한 반대파의 병력들은 비밀리에, 그러나 매우 조악하게 조직된 공격을 94년 10월 중순내내 그로즈니에 실행했다. 이 공격들은 별 성과가 없었고 1994년 11월 26~27일에 걸쳐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된다.
1차 그로즈니 전투 (1994년 11월 26일)
| November 1994 Battle of Grozny | |||||||
|---|---|---|---|---|---|---|---|
| Part of First Chechen War | |||||||
| |||||||
| Combatants | |||||||
| Chechen Provisional Council FSK mercenaries | Chechen Republic of Ichkeria | ||||||
| Commanders | |||||||
| Umar Avturkhanov Beslan Gantemirov | Aslan Maskhadov | ||||||
| Strength | |||||||
| 1,200 to 5,000 | unknown | ||||||
| Casualties | |||||||
| ~500 killed and 200 captured (including over 70 Russians[1]) | unknown | ||||||
전투는 두다예프 반대파의 병력들과 이를 지원하는 러시아군의 전차, 항공기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 은밀한 정권 전복 시도는 완벽한 실패로 끝났으며, 다음달 모스크바가 체첸에 대한 대규모 군사적 침공을 수행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배경
1994년 여름, FSK(FSB의 전신, 연방 방첩부)는 체첸내에서의 작전을 개시하고 체첸의 두다예프 반대파 지도자들과 협력을 시작했다. 우마르 아투르카노프(전직 소련 내무부 장교)의 병력들과 베슬란 간테미로프(전 그로즈니 시장)의 병력들은 모스크바로부터 자금(1500억 루블이 언급되었다.)을 지원받았을뿐만 아니라 무기도 지원받았다. 1994년 8월과 9월에 걸쳐 반대파와 두다예프의 군대간에 전투가 계속되었고 이 시기에 반대파는 수백명의 병력과 장갑차량, 모즈독 비행장에 기지를 둔 러시아군 헬기로부터 지원을 받는 부대를 편성했다. 반대파의 공세는 94년 10월 중순, 간테미로프의 병력들이 처음으로 그로즈니 시를 직접 점거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을때 종막을 맞게 된다.
10월의 전투 이후, 그들의 군사적인 취약함을 알고 공격실패에 실망한 전직 하원의장 루슬란 카스불라토프는 FSK에 대한 로비를 강화하여 옐친 대통령의 참모진에게 모스크바가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부분을 늘리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아투르카노프와 간테미로프는 서로의 병력을 합류시켰고 필요한 모든 무기와 교관, 훈련과 미디어까지 그들이 요청한대로 지원받았으며 마지막 전투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 임무를 위해 러시아군의 정예전차부대의 전차승무원들이 모집되었다.
전투의 진행
그로즈니시에 돌입하기 얼마 전, 러시아군 정보국(GRU)의 첩보원들은 도시로 향하는 동안 이미 3대의 러시아군 전차가 격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다예프의 군대는 강력한 저항을 할만한 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11월 26일 아침, 체첸 임시의회의 병력들은 구별가능한 표식을 지운 러시아군 헬기들의 지원을 받으며 수도에 진입했다. 체첸 정부군(두다예프의 군대) 지휘관 달칸 코자예프의 증언에 따르면 반대파는 42대의 전차와 8대의 BTR 장륜장갑차, 3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고 한다. 다른 이들은 반대파의 병력을 최대 170대의 전차와 APC, 5000명의 병력으로 추산했고 반대파 지휘관의 증언에 따르면, 1200명의 병력이 이 공격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병력들은 즉흥적이지만 맹렬한 정부군의 반격에 직면했고 곧 전투는 재앙으로 돌변했다. 거의 20시간에 달한 치열한 전투이후, 두다예프의 군사들은 반대파의 장갑차량 대열을 박살내버렸고, 전차와 장갑차들의 승무원을 맡은 수십명의 러시아 병사들과 장교들이 포로로 잡혔다. 37대에서 67대에 이르는 장갑차량이 파괴되거나 가동불능이 되었다고 보고되었으며, 그동안 4~5대의 멀쩡한 전차가 반대파 군사들이 도주한 이후 고스란히 두다예프의 정부군에게 노획되었다.(체첸국기를 달고 시내를 질주한 바로 그 전차들 -_-;;) 이에 더해 러시아군에 의해 운용된 4대의 헬리콥터와 1대의 Su-25 공격기가 격추되었다. 남아있는 모든 러시아군 전차부대와 이를 지원하던 반대파의 병력들은 같은 날 도시에서 후퇴했다.
결과
이 패배는 군사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재앙이었다. FSK에 의해 비밀리에 고용되었고 이 전투에서 잡힌 러시아군인들은 두다예프의 장기집권을 위한 선전용 도구로 쓰였다. 이를테면 "두다예프 반대파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모스크바의 제국주의 게임을 위한 도구들만이 있을뿐이다!"는 식으로 말이다. 러시아가 이 전투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처음에는 모스크바에 의해 부인되었으나 두다예프의 병사들이 몇몇 잡힌 러시아군 병사들을 TV 카메라 앞에서 행진하게 함에 따라 인정되었다.
11월 26일의 패배는 러시아가 두다예프에 맞서 대리인을 내세워서 전쟁을 하는 수단을 고갈시켰고 그 다음달에는 러시아 국방장관 파벨 그라체프 "단 2시간이면 1개 공수연대로 도시를 장악할 수 있다" 고 큰소리친 또 다른 재앙적인 직접 군사개입으로 이어지게 된다[..]
개인소견
러시아가 구상한 대리전쟁은 크게 3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이는,
1. 종합적인 정보수집과 분석의 실패 - 모스크바는 반대파와 러시아군의 전투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두다예프의 정부군을 심히 과소평가했다. 이 당시 두다예프의 보유병력은 자세히 알려지진 않았으나 러시아군이 직접 개입하지 않은 상황인만큼 반대파에 비해 더 많은 병력을 보유했을 것이며 두다예프 자신은 소련공군 장성출신에, 이 전투를 이끈 마스하도프는 소련군 포병 대령 출신이다. 정치가가 결성한 반대파의 민병대에 비해 두다예프의 군대는 대부분 소련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으며 체첸의 전권을 장악하면서 오랜 기간 군사훈련을 실시할 여유가 있었다. 이에 더해 두다예프의 병력들은 도시의 주요거점을 장악하고, 11월 이전부터 방어태세를 굳혔다. 이런 모든 불리한 요소는 적절히 보고되지도 못했고 모스크바는 그저 자금과 장비지원만 있으면 반대파가 충분히 정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2. 군사적 실패 - 반대파의 병력들은 기초적인 군사훈련도 완료된 상태가 아니었으며 당연히 러시아군 전차, 헬기들과의 협동작전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투입병력도 충분하지 못한 상황인데다가 전투는 그해 8월부터 시작된 반면 결정적으로 두다예프의 전력을 패퇴시킬만한 승리가 없었기에 반대파는 많은 중화기와 장비를 지원받았음에도 그 숙련도는 지극히 열악했고 반대로 두다예프의 병사들은 시가지에서 방어전을 치룰 준비를 충분히 갖출 시간적 여유를 가졌다. 이에 더해 남쪽의 그루지야로부터 두다예프군을 지원할 보급대열은 차단되지 못했고, 그로즈니 시가전 역시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진입한게 아니라 단순히 밀고나간것에 불과하다. 반대파의 보병들은 쏟아지는 사격에 곧 흩어져버렸고 러시아군 전차들은 자신들의 대열속에 갖혀 허둥댔으며 제대로 응사조차 하지 못했고 빠져나가지도 못한채 RPG세례에 격파되었다. 지원에 나선 헬기와 항공기들 역시 그리 잘 조직된 대공포화를 만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사격을 받고 추락했다. 이런 문제들은 이후에 치뤄진 전투에서도 자주 반복되었으나 서로 다른 소속의 부대끼리 협동훈련 없이 치뤄진 이 전투에선 더욱 심각했다.
3. 주도권 장악의 실패 - 이 전투의 패배는 정치적으로도 그 손실이 막심한 것이어서, 반대파의 입지와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모스크바가 전개상황에 있어서 충분한 주도권을 쥘만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전투를 패배한 시점에서 모스크바가 도저히 두다예프 정권을 용납할 수 없다면 이 전투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개선해서 대대적인 공격으로 최대한 빨리 두다예프를 끝장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치뤄진 러시아의 직접 공격은 모두 전술적으로 큰 문제점을 노출했고 결과적으로 완전한 패배였다. 러시아는 계속되는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어야 했으며 여론 역시 꾸준히 악화되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장점(친러시아정치세력의 존재, 확고한 제공권과 화력우위, 러시아인 추방과 두다예프의 독재에 반대하는 여론)들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계속 수렁속에 빠져있다가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 이 당시 옐친이 알콜중독증세로 인해 제대로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설도 있는데, 정책결정과정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PS 1 : 일터에서 재빨리 쓴 것이라 퀄리티나 풍부한 짤방, 영상 등이 없는 점 양해바랍니다[..]
PS 2 : 축전드리고 싶은 분은 많은데, 제가 워낙 재주가 없고 이런 종류의 글빨은 축전용으론 좀 너무한듯하기도 하고[...] 요청을 받은 적도 없어서 머뭇거려왔습니다만 앞으로 종종 이웃분들께 날려드리겠습니다;;(그전에 약속한 포스팅부터 쓰란 말이닷!)
PS 3 :
대제님 20만힛 축하드립니다!!!
# by | 2007/12/28 17:13 | Battle - 프로젝트란(미정)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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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1님// 안타깝게도 배경설명이 정말 중요한데 굉장히 간단히 적어버렸습니다.
프티제롬님// 에..... 일단 분쟁개시후의 체첸은 거의 체첸인이 주류이기 때문에 종교는 거의 수니파 이슬람으로 90%이상 통일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종교적인 문제보다는 부족간의 이익과 러시아의 정치적 입지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체첸에 바쿠유전으로 가는 파이프라인이 있긴 하지만 저는 그게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현실주의이론가들은 대개 국가의 목표는 언제나 뚜렷하고 그 의사결정과정이 합리적이라고 보지만 러시아의 체첸군사개입과정은 비합리적으로 이뤄진 측면도 강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소수민족국가들에 대해선 끈질기게 자치권 조약에 서명하도록 설득한 옐친 정권이 유독 체첸에게는 강경했던 점. 그리고 체첸 역시 지독할 정도로 러시아에 반대하고 맞서려 했던 점이 그루지야가 떨어져나간 러시아에게 있어서 '흑해-카스피해권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유지하려면 체첸을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SSBN함장단햏사마// 2시간동안 매달렸을뿐입니다요[..]
어부님// 94~96년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저항강도로 봐선 결국 옐친이 무리한 군사작전을 보류하고 확실한 준비를 해서 공격한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해도 전쟁의 장기화는 막을 수 없었을것 같기도 합니다. 일단 07년 기준으로 러시아군 항공기 격추 사례나 러시아군의 피해도 크게 줄어들었고 주둔 러시아군도 감소 추세이긴 합니다만 아직 완전히 끝난것은 아니구요. 개인적으로는 그루지야가 친서방계통으로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체첸문제도 다시 고개를 들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아침안개님//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시면 진성 대인배분들께서 노하십니다[..]